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한영 암살 사건 (문단 편집) == 아내 김씨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3452362643523423.jpg|height=4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312312.jpg|height=400]]}}}|| ||<-2> 2009년 2월 26일 오전, 이씨 피격 12주기를 맞아 추모예배에 참석한 이한영의 아내 김종은씨. || 이씨의 아내 김씨는 "남편이 사망한 후 국정원은 500만원을 주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으며, 재판이나 언론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나가지 말아달라는 주문만 했을 뿐 어떤 사과나 보상도 한 적이 없다" 고 밝혔다. 훗날 김씨 왈 "아직도 남편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지울 수 없다. 남편은 피격 당하기 전 장총을 든 검은옷의 사람들이 자신을 쫓고 있는 꿈을 꾸며 불안해했다. 남편은 분당의 선배집에 주소지를 옮겨놓고 열흘에 한번씩 들르곤 했는데 어떻게 그날을 알고 저격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라고 밝혔다. 그녀는 그동안 누구를 만나도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집안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고. >"누가 간첩인지 모르는 세상이잖아요." >"소식을 잘못 전해들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전부터 이한영씨가 저에게 했던 얘기들도 있었고 밤에 불을 못 끄고 잔다든가 불안해했던 일들을 제가 알고 있었는데 저는 현실적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죠. 일어났으니까 '이제 그랬구나' 라고 하지만 그럴줄 알았다면 더 조심하고 더 안전을 위해서 가족들이라도 그 사람을 지켜 줬어야 했는데, 또... 하나 하나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더라구요. 그때는 미쳐 생각이 안 들던 것들이..."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55555555555555555555.jpg]]}}}|| || 이씨의 아내 김씨의 모습. || >"88년도 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릴때 그때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KBS에서 진행하고 있는 어떤 행사에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이었고, 애 아빠는 그걸 진행하는 진행자였어요." 그는 남편에 대해 "통일된 조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고 회고했다. >'평범한 사람이었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나 도움 원하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는 마음이 훈훈하고 따뜻한 사람' 생전의 이한영씨에 대해 김씨는 "북한에서 로열패밀리로 호화스럽게 살았다고 해서 그런 것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고 했다. >"물론 그때도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었지만 지금와서 생각하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강렬하게 느껴지는게 뭐냐면 참 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아주 특별한 성격이나 특별한 어떤 개성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한국에 있는 다른 집에 있는 그런 남자들... 아버지들 모습처럼 그런 모습이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친구들하고 포장마차 가서 소주한잔 기울이는 걸 너무나 좋아했고... 그 시절에... 친구들을 너무 좋아했고 사람들하고 집에 초대해서 집에서 많은 사람들 하고 있는 걸 좋아했고... 많이 베풀고... 혼자여서 외로웠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직장 동료나 주위 사람들이 친절하게 배려를 해주면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꼭 보답을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꼭 술값을 자기가 냈어요. 절대 돈이 많아서가 아니에요. 자기와 술을 같이 마셔주는 것 자체가 고마워서 보답을 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흔히 특권층 사람들은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에 비해 남편은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고 정이 많고 예의가 발랐어요. 제가 남편을 좋아한 것도 그런 점 때문이었죠." 김씨는 "그이를 처음 만났을 때 북한에서 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면서 "유머 있고, 마음씨 곱고, 여유가 있어 부잣집 귀공자인 줄 알았다" 고 말했다. 김씨는 "결혼하기 한 달 전 그가 북한의 로열패밀리였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면서, "집안의 반대도 있었지만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고 회상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D1JH7W.jpg|width=100%]]}}}|| || 2007년 2월 26일 이씨 사망 10주기를 맞아 아내 김씨가 꽃을 선물하고 있다. || 아내 김씨는 남편으로부터 북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김정일에 대해서는 가족이어서인지 나쁜 얘기는 별로 한 것이 없지만, 정치범수용소라든가 굶주리는 사람들, "김정일이 해외로 망명해 빨리 조국이 통일됐으면 좋겠다" 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씨는 입국 이후 사업실패로 큰 시련을 겪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재기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고 한다. >"초콜릿 사업으로 우리 부부는 정신없이 일했어요.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를 보내고 그 다음 날인 15일에 그이가 피격됐습니다. 21일 딸 예인과 약속한 생일파티에는 끝내 참석하지 못했죠." 이한영씨는 늘 외로웠는지 친구 만나는 것을 좋아했고, 그럴 때마다 술값은 으레 이씨의 몫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신혼여행 때 출국금지된 자신의 처지 때문에 아내에게 해외여행을 시켜주지 못한 것을 마음의 응어리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고 밝혔다. 김씨는 "남편이 남기고 간 딸 예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도록 억울하게 죽어간 이한영씨의 한을 풀어주는 게 남은 자의 몫이요, 제 생의 희망" 이라고 말했다. [[파일:7777777777777777777777777.jpg]] 이씨의 부재는 김씨뿐 아니라 아이도 감당해야 할 몫이다. 김씨는 아이가 어렸을 때는 아빠가 출장을 간 것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더이상 아빠가 없는 이유를 숨길 수 없어 처음으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아이라고 왜 생각이 없겠어요. 주말에 친구집에 놀러가면 친구의 아빠가 있잖아요.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빠 이야기가 나올 테고, 학교에서 가족사진을 가지고 오라고 할 때도 있고요. 그래서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아빠랑 엄마가 이혼해서 따로 사는 것이어서 지금은 아빠를 보지 못하지만 나중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 말하더군요. 아빠가 죽은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을 하는데..." [[파일:444444444444444444444.jpg]] >"처음엔 남편의 명예회복을 위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았어요. 경제적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누구도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변호사 한분을 찾아가 상담한 적이 있는데 소송할 엄두를 못 내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하고 살았어요. 그러다 4년전(2000년도)쯤, 남편의 책을 읽고 사상이 바뀌었다는 분을 만났어요. 그분의 도움으로 3년 넘게 준비한 끝에 작년(2003년)에 소송을 시작한 것이죠. 그분 말이 '책을 읽고 이 가족은 국가가 보호해야 하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하더군요." 소송의 핵심은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이씨의 죽음에 국가의 과실이 명백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씨가 자서전을 쓰고 언론과 인터뷰하는 바람에 신분이 노출돼 위험해졌다는 국정원측의 주장에 대해, 김씨는 "괴한들이 그들의 집을 알아내는데 교도관, 경찰관이 개입한 사실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 에 승소를 확신하고 있다. 김씨는 소송이 마무리되는 대로 남편의 묘를 통일의 상징인 임진각 쪽으로 이장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한영씨 문제에 대해서 방관하고 있는 것 같은 정부에 대해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요, 모든 것들이 발달이 되고 발전이 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정부에서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모습이 선진국으로 가는 모습인거 같아요. 그래서 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어요. 그래서 이 재판이 더더욱 중요한 재판이라고 생각하고 이 뒤에 또 일어날 일들, 또 탈북자들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한영씨 문제가 잘 해결돼야지만 잘 풀려나갈 수 있을거 같아서 열심히, 정말 열심히 재판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파일:4353461.jpg]] 생전 이씨는 얼굴이 알려진 후 죽음을 예감했던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발 포기하지 말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 는 말을 김씨에게 여러번 얘기하며 그의 유언으로 부인에 뜻에 의해 2004년 재출간 된 '김정일 로열패밀리' 내용은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 과 동일하다. 김씨는 예전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신앙심이 없었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었을 것" 이라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국가가 국가의 역할을 다했으면 좋겠다" 는 바람을 피력했다. >"제 자식의 아빠를 죽게 한 나라지만 그래도 저는 국가를 사랑하기에 앞으로 고통 받고 힘든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요. 정부도 국민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역할을 다해주었으면 좋겠어요."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